400년간 묵은 갈등, 화해의 가치를 세운다

  • 등록 2020.11.20 22: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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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서원 복설 고유제 및 추향례 개최... 병호시비 종지부 찍는 화해의 장
- 영남유림 대통합의 성과... 화합과 상생의 새시대를 여는 경북 정신문화의 상징



(경북도=뉴스경북) 김승진 기자 = 영남유림을 대표하는 서애 류성룡 선생 가문과 학봉 김성일 선생 가문의 400년간 이어진 묵은 갈등(병호시비)이 호계서원 복설 고유제를 계기로 화해의 가치를 새로 세운다.


호계서원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서원 중 하나로 1573년 여강서원으로 창건된 후 숙종 2년(1676년) 사액되면서 호계서원으로 명칭을 바꿨다.


이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철거 후 7년 뒤 강당만 새로 지은 채 남겨졌다가 안동댐 건설로 1973년 임하댐 아래로 이건 됐으나, 습기로 서원건물 훼손이 우려되자 지역유림 등에서 이건과 복원을 요청했다.


이에 경북도는 2013년부터 총사업비 65억원을 들여 도산면 서부리로 이건 및 복원을 추진해 지난해 말 안동시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 부지에 복설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된 호계서원은 1만㎡의 부지에 13동의 서원건물로 구성되었으며, 총 93칸에 이른다.


복설된 호계서원은 ‘병호시비(屛虎是非)’라는 400년간 이어진 영남유림 간 갈등에 종지부를 찍는 징표이다.


‘병호시비(屛虎是非)’란 퇴계선생의 제자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선생을 배향하는 과정에서 위차(서열) 문제가 불거지면서 발생한 3차례의 시비를 말한다.


호계서원 내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의 위패 서열을 두고 벌어진 병산서원과 호계서원 사이의 대립으로 400여 년간 갈등을 빚어왔으며,  갈등이 깊어지면서 영남유림을 둘로 갈라놓았다.


이런 해묵은 갈등은 경북도의 중재로 류성룡을 퇴계 위패의 동쪽에, 김성일을 서쪽에, 김성일의 옆에 그의 후학인 이상정을 배향하기로 합의하면서 영남유림 간 오랜 갈등이 비로소 해결됐다.


호계서원 복설추진위원회(회장 노진환)는 20일 호계서원 복설(復設) 고유제 행사를 개최하고 영남유림 간 해묵은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는 대통합의 자리를 마련했다.
 ※고유제 : 국가나 개인의 집에서 중대한 일을 치르고자 할 때 종묘(宗廟)나 가묘(家廟) 등에 그 사유를 고(告)하는 제사


이날 열린 고유제는 호계서원의 복설 소식을 널리 알리고, 경북정신문화의 발전을 기원하는 자리로 이철우 경상북도지사, 임종식 경상북도교육감, 윤동춘 경북경찰청장, 권영세 안동시장을 비롯해 각 기관단체장 및 유림대표 등 50여명이 참석해 호계서원의 복설을 함께 기념했다.


이날 초헌관으로 참석한 이철우 도지사는 “이번 호계서원의 복설은 영남유림의 합의에 의해 대통합을 이루어낸 성과”라며, “화합, 존중, 상생의 새 시대를 여는 경북 정신문화의 상징이 될 것”이라며,

“이러한 화해와 대화합의 상생 메시지가 지역의 미래를 좌우할 통합신공항 건설과 대구‧경북행정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정신적 구심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병호시비(屛虎是非)


퇴계선생을 모신 여강서원 (1573년 건립, 1676년 숙종때 사액을 받아  호계서원으로 개칭)에 선생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류성룡(1542~1607)을 배향하는 과정에서 위차(서열) 문제가 불거지면서 생긴 3차례의 시비를 말한다.


퇴계의 수제자는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월천 조목, 한강 정구를 꼽는데 누구를 퇴계와 함께 배향할 것인가에 대해 문중을 넘어 제자들 간에 보이지 않은 대결구도의 양상을 띠고 전개 되었다.


1620년 병호시비의 발단(1차)은 퇴계를 모신 여강서원에 네 살위인 학봉을 상위에 모시자는 장유유서를 주장과 영의정을 지낸 서애를 상위에 모시자는 관작 주장 하였으나 서애 류성룡을 상석으로 결정으로 일단락 [영남학맥 좌장 우복 정경세(1563-1633) 위임 결정]


1805년 병호시비 2차 논쟁은 영남유림에서 성균관 문묘(文廟)에 영남을 대표하는 4명의 유학자를 종사(從祀)하게 해 달라는 상소를 올려 학봉 김성일-서애 류성룡 순으로 결정하자 서애 제자들이 서열문제로 반대하며 독자적으로 상소를 추진하자 조정에서는 상소문을 모두 기각함.


병호시비 3차 논쟁은 학봉과 서애 문중과 제자들의 시비로 문묘배향의 기회를 잃어버린 한강과 여헌의 제자들이 독자상소를 결정하고 유림에 “학봉, 서애...”순으로 통문을 작성하자 서애 제자들은 호계서원과 결별하고, 병산서원에 회향함. 이후 안동유림은 학봉(虎溪書    院)과 서애(屛山書院)으로 갈라지게 되고, 오늘까지 400년을 이어오는 갈등이 유지됨.


 ▶ 병산서원의 병(屛)자와 호계서원의 호(虎)자를 따서 병호시비라 부르게됨
  호계서원 복설과 고유제 행사 : 서애(동쪽), 학봉(서쪽) 배향으로 최종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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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국/김승진 기자 기자 newsg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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