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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연/전시

[뉴스경북=구미시] 구미오페라단 '왕산허위 오페라공연' ... 11/20(목) 구미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구미출신 의장병 왕산허위를 제작 공연하여 왕산허위의 애국심을 널리 홍보하고 종합예술인 오페라를 통해 지역 문화예술 발전과 대중화에 이바지하며 오페라공연을 통해 지역예술인들의 화합을 이끌어 내며 예술발전에 기여코자 구미오페라단이 준비한 '왕산허위 오페라공연'이 2014년 11월20일 오후7시 구미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막을 연다.

 

구미시와 구미오페라단이 주최한 구미오페라단의 순국선열의 날기념 오페라 “왕산허위” 공연 내용을 소개한다.  

 

 

구성 및 내용<줄거리 Synopsis> : 전4막

-등장인물

1. 왕산 허위 : 테너 (드라마티코)

2. 신씨 부인: 소프라노 (리리코)

3. 금아 : 소프라노 (레지에로)

4. 하야시 : 바리톤 (로부스트)

5. 김득구 : 바리톤

6. 송병준 : 테너 (레지에로)

7. 고종 : 베이스 (드라마티코 또는 로부스트)

8. 이기찬 : 바리톤

9. 조동호 : 테너 (레지에로)

10. 명성황후 : 소프라노

대신들 (합창단 중에서)1, 2, 3

상인 1, 2

아낙네들

장터의 사람들

의병들외

 

제1막 1장: 국모의 죽음

궁궐 안을 배경으로 하여, 명성황후를 에워한 일본자객들과 당혹해 하는 시녀들 그리고 대신들의 모습이 보인다. 결국 명성황후는 의연한 자세로써 자객들에게 시해를 당하며 극적인 음악묘사가 이루어진다. 멀리서 소식을 접한 주인공 ‘왕산 허위’의 통곡과도 같은 아리아가 이어진다.

 

제1막 2장: 대한제국의 멸망

궁궐 안이 배경이며, 일본의 고관 ‘하야시’와 매국노 ‘송병준’은 고종에게 외교문서에 서명을 하게끔 갖은 협박과 회유를 하고, 고종은 이에 맞서 강하게 반항하지만 결국 강제로 서명을 하게 된다. 기뻐하며 간교한 웃음을 짓는 하야시와 송병준의 표정과는 대조로, 고종은 침통한 표정과 절규로써 아리아를 노래 한다. 의연한 자세로서 왕산허위 등장하고, 애처로운 표정의 신씨 부인과의 2중주 노래하고, 왕산을 싸움터로 보내는 신씨부인의 아리아가 이어진다.

 

제2막 1장: 대장기 휘날리며,

김산(김천)의 본진이 배경이다. 조동호와 김득구의 진으로 왕산과 이기찬이 합세하여 의병의 모집하기 위한 의기를 투합한다. 이기찬이 총대장으로 임명되고, 왕산은 참모역할을 하기로 한다. 하지만 김득구는 왕산을 경계하는 표정이다.

 

제2막 2장: 피로 쓴 맹세

장터가 배경이다. 순박한 처녀 금아가 장터의 곳곳을 흥겹게 돌아다니며 장터는 흥겨움과 떠들썩함으로 들떠 있다. 왕산을 중심으로 의병대장들과 의병들이 장터에서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백성들은 냉담한 표정이다. 이때 금아가 나서서 장터의 사람들을 설득하지만 사람들 틈에서 무시당한다. 이때 대장기가 넘어지고, 왕산이 나서서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자신의 강한 의지를 보이며 혈서를 쓴다. 외면하던 장터의 사람들, 한사람씩 의병이 되기로 결심한다. 김득구 무릎을 꿇어 목숨바쳐 왕산을 따를 것을 결심한다. 사람들을 대장기를 세우고 왕산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한다.

 

제3막 적들의 소굴 그리고 음모

궁궐 안이 배경이다. 고종의 어명에 의해 궁으로 입궐한 왕산에게 ‘평리원수반판사’의 직을 내려 임무를 하달한다. 왕산은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다짐하고, 간교한 하야시와 송병준은 계략을 꾸민다. 창의군에게 서찰을 쓰던 중 신씨부인을 떠올리고, 신씨부인 먼발치에 등장하여 열정적인 아리아를 부른다. 김득구, 왕산에게 서찰을 전달 받아 의병대로 출발하고, 간교한 일본의 수장 ‘하야시’와 왕산의 2중창이 이어지고, 왕산과 조선을 비웃는 하야시의 아리아가 불리어진다. 일본군에 의해 김득구, 밀서가 적인 서찰을 빼앗기고, 이를 본 하야시는 김득구를 협박하기 시작한다. 괴로운 마음의 김득구의 아리아에 이어 갈등과 반항 그리고 획책과 대립의 내용이 담긴 남성5중창(왕산, 하야시, 고종, 김득구, 송병준)과 함께 막이 떨어진다

 

제4막 13도 창의군의 결성 및 서울 진격 작전

의병진영안이다. 왕산과 이기찬 등 작전을 논의하고, 총대장 이인영의 부재로 인해 총대장 역할을 왕산이 맡게 되며, 그의 강한 명령과 함께 모든 의병들 함성과 함께 진격을 한다. 하지만, 매복해 있던 일본군에 의해 진격로를 차단당하고, 강력한 전투가 벌어진다. 극적 음악이 묘사된다. 의병들 모두 전사하고, 정적만 남아있는 격전지에서 금아 쓸쓸히 의병들을 살핀다. 이 때 왕산을 발견한 금아, 왕산에게 발길을 돌리던 중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쓰러진다. 달려간 왕산에 의해 부축되고 금아, 죽음의 아리아를 슬프게 부르고 죽음을 맞이한다. 이에 왕산의 분노의 아리아가 이어진다

 

제4막 3장: 왕산의 죽음

사형집행장이 배경이다. 주변에는 죽은 의병들의 시신이 즐비하다. 옥에 갇힌 왕산의 모습이 보이고 간교한 하야시와 송병준과 일본군들이 둘러 서있다. 김득구, 처절한 후회와 함께 슬퍼하는 모습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신씨부인이 등장하여 이별의 아리아를 부른다. 왕산 마지막 아리아를 부르고, 신씨부인과 함께 교수대의 밧줄로 걸어가며, 하야시의 지시에 의해 교수형은 집행된다. 이윽고 모든 죽었던 의병들과 등장인물들 서서히 일어서며, 대합창이 이어진다. 합창이 이어지는 동안 왕산, 무대 후면에서 찬란한 빛을 받으며 걸아나와 당당하게 서서 함께 대합창을 노래한다.

 

왕산 허위 소개

 

 

( 1854. 4. 1~1908. 9. 27) 호:왕산(旺山) 자:계형(季馨)

 

한국의 의병장, 독립운동가 국가유공자1호이며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 출신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왕산로는 그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고, 구미시에는 왕산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왕산(旺山) ()는 유생으로서 제1차 의병전쟁에 참여하였고, 제2차 의병전쟁에는 관료 출신자로서 참여하였다. 그는 당시 의병장으로서는 드물게 해외 경륜도 있었으며, 따라서 서구 문물의 우월성을 절감한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개화 의지를 지닌 선구적 인물이었다. 1897년 3월 이은찬(李殷贊)・진사 조동호(趙東鎬)・이기하(李起夏)와 더불어 거의(擧義)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양제안(梁濟安)을 선봉장으로 삼아 김천(金泉) 장날을 이용하여 장정 수 백명을 모집하여 금산군(金山郡) 기고소(器庫所)의 병기(兵器)를 압수해서 금산과 성주(星州) 사이에 의병을 벌려 놓고, 원근에 격문을 발송해서 군사를 모집했다. 그러나 아직 세력을 굳히기도 전에 대구의 관병이 성주를 치고, 이어서 경성과 공주의 관병이 합세하여 이은찬과조동호를사로잡아갔다.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서 진천(鎭川)으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근신(近臣) 전경운(田慶雲)이 왕명을 받들고 와서 의병을 해산시키라 권고하므로 부득이 장졸들을 타일러 제 고장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안타까웠던 마음이 다음의 시에 잘 나타나 있다.

 

"호남 삼월달에 오얏꽃 날리니 나라에 보답하려는 서생 갑옷을 벗었네.

산새도 어떻게 시사 급함을 알고서 밤새도록 나를 불러 불여귀를 외우네."

 

그 이후 세상을 등질 뜻을 갖고 방산옹(舫山翁)을 따라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초야(草野)에 묻혀두지를 않았다. 대신 신기선(申箕善)이 왕에게 "의 경륜하는 것과 포부는 세상에서 관중(管中)과 제갈량(諸葛亮)이라 일컫사오니 불러서 쓰시는 것이 바로 이 때가 아니겠습니까”하고 아뢰어 1899년 3월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을 제수받기에 이르렀다. 이 때 왕의 부름을 받은 "벼슬하는 것은 나의 근본 뜻이 아니지만, 외적을 쓸어 없애지 않을 수가 없고, 국가를 회복시키지 않을 수가 없으니 내 장차 시험하리라”고 하였다. 이렇게 관로에 들어선 그는 그 다음달에 성균관 박사가 되고 1904년에는 주차일본공사 수원(駐箚日本公使 隨員), 중추원 의관(中樞院 議官), 정삼품 통정대부(正三品 通政大夫), 평리원 수반 판사(平理院首班判事)를 거쳐 평리원 재판장(平理院裁判長)이 되었다. 이어서 그해 8월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에 제수되자, 국가의 폐단을 없애고 벼슬길을 맑게 할 것을 주장하는 다음의 시무10조를 건의하였다.

 

첫 째 :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를 것.

둘 째 : 군정(軍政)을 닦아서 불시의 변에 대비할 것.

세 째 : 철도를 증설하고, 전기를 시설하여 교통과 산업에 이바지할 것.

네 째 : 연탄을 사용하여 산림을 보호 양성할 것.

다섯째 : 건답(乾畓)에는 수차(水車)를 써서 물을 대도록 할 것.

여섯째 :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못을 파서 물고기를 기르며, 또 육축(六畜)을 기르도록 힘쓸 것.

일곱째 : 해항세와 시장세를 날로 더하고 달로 증가시켜 장사군에게도 공평한 이익을 얻도록 할 것.

여덟째 : 우리나라 지폐의 폐단이 심하니 은행을 설치하여 금・은・동전을 다시 통용시킬 것.

아홉째 : 노비를 해방하고 적서(嫡庶)를 구별하지 말 것.

열 째 : 관직(官職)으로 공사를 행하고 실직(實職) 이외에는 차함(借啣)하는 일을 일체 없앨 것.

 

이상에서 미루어 보아 그는 다른 위정척사론자들과는 다른 개화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이로써 그가 처음에 관직에 발을 딛게했던 바의 국권회복을 위한 방안을 건의했으나, 이미 정부가 그의 시무안을 받아들일 단계에 이르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는 소()를 올려 사직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10월에 이정소 의정관(釐正所議正官)이 되고 다음해 3월에는 비서원승(秘書院承)이 되었다. 이등박문(伊藤博文)이 내한하자 나라의 형편은 더욱 위급해져 갔다. 마침 독일인 요관(要官) 중 한 사람을 만나 그에게 무기를 빌려 받을 것을 약속하고, 민모(閔某)와 함께 의논 독일에 갈 것을 꾀하였으나, 민의 위약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그는 최익현(崔益鉉)・김학진(金鶴鎭)과 더불어 격문을 살포한 것이 문제가 되어 투옥되었다. 김()은 하루, 최()는 이틀만에 석방되었으나, 그는 4개월동안 일본사령부(日本司令部)에서 온갖 고초를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다시 소를 올려 관직을 사양하였다. 서울을 떠나 지례(知禮)의 삼도봉(三道峰) 아래 두대동(頭大洞)에 은거하였다. 그러는 중에 5조약(五條約)이 맺어졌다. 울분을 금치못하고 있던 차에 1907년 4월 어느 사람이 와서 임금의 글을 전했다. 거기에는 다만 거의(擧義)라는 두 글자가 써 있었을 따름이었다. 이것이 곧 의대조(衣帶詔)이다. 이미 고종황제가 순종에게 양위한 융희 원년의 일이었다. 뿐만아니라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었고, 7조약(七條約)이 체결되었다는 말을 듣고 경기도에서 의병을 모아 포천(抱川)・연천(漣川)・적성(積成)・삭녕(朔寧)・철원(鐵原)・양주(楊州) 등지에서 벌려세워 강화(江華)를 향해 내려갔다.

 

이때 부하 김규식(金奎植)・연기우(延基羽)・권중설(權重卨) 등이 여러번 적진을 깨뜨리니 경기의병의 이름이 크게 떨쳤다. 이에 국내의 지사들에게 연락하여 양주(楊州)에서 모이니 군대가 도합 만여명에 이르렀다. 이인영(李麟榮)을 추대하여 총대장을 삼고, 는 군사장(軍師長) 즉 작전참모가 되었다. 그간의 전력을 통해 그의 병술(兵術)과 전략이 뛰어났음이 인정된 것이다. 이인영의헌병조서에보면이때양주에집결한 13도 의병장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전라창의대장(全羅倡義大將) 문태수(文泰洙)(일명문태현(文泰鉉)),호서창의대장(湖西倡義大將)(충청) 이강년(李康秊),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강원) 민긍호(閔肯鎬), 교남창의대장(嶠南倡義大將)(경상) 신돌석(申乭石),관서창의대장(關西倡義大將)(함경)방인관(方仁貫),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경기・황해)()등이다.즉는군사장겸진동창의대장(鎭東倡義大將)으로서 경기도와 황해도의 의병을 이끌었음을 알 수 있다. 의 작전계획에 의하면 일본군의 방위망을 뚫기 위해 각 의병대가 분산하여 서울로 향하되, 같은날 동대문 밖에 집결하기로 기약되어 있었다. 이리하여 는 몸소 결사대 삼백명을 인솔하고 서울 성문밖 30리 지점에 이르렀고, 이어 다른 부대가 뒤따라 도착하였다. 그러나 이 작전은 사전에 너무나 널리 알려져 있었으니,「대한매일신보」같은 신문은 이 일이 있기 이미 두달 반 전에 이를 크게 보도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일본군의 대비책은 철저하여 그들은 양주 의병의 진로를 차단하는 한편, 한강의 선박 운항을 일체 금지하고,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기까지 했다. 이같은 삼엄한 일본군 수비에도 불구하고 의병의 일부병력은 세검정을 거쳐 자하문 밖에 이르렀다. 그런데 의 선착부대는 후속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았으며, 마침 이때 총대장 이인영이부친의부음을듣고뒷일을에게 부탁하고 귀향하니 의병의 주력부대는 흩어져 물러서고 말았다. 바로 1908년 2월 28일 음력1월 말의 일이었다. 13도 연합 의병 부대의 서울 공략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 그 주력부대는 속속 임진강 유역으로 집결하여 1907년 이래 그곳에서 활약하고 있던 조인환・권준(權俊)・왕회종(王會鍾)・김진묵(金溱默)의병 부대와 합류하기 시작했다.

 

이때 이곳으로 이동 합류해 온 의병부대는 비롯하여 박종한(朴宗漢)・김수민(金秀敏<>)・김응두(金應斗)・이은찬(李殷瓚) 의병 부대였다. 이들은 를 총대장으로 삼아 의병 부대를 재정비함으로써 여기에 임진강 유역의 연합 의병 부대가 발족을 보게 되었다. 연합 의병의 총대장이 된 는 그 후 계속 임진강 유역의 연합 의병 부대를 지휘하면서, 군율(軍律)을 정하고, 군표(軍票)를 발행하고, 군사를 훈련하고, 군기(軍器)를 제조하게 하였다. 한편 연안 지방민에게 납세를 명하고, 미곡 반출의 정지를 호소하여 군량 확보를 도모하였다.

 

1908년 4월에 또 13도의 의진(義陣)에 통문(通文)을 내어 다시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의 국내적 결속을 공고히 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해외로는 박사 경현수(慶賢秀)를 청국혁명당(淸國革命黨)에 파견하여 군사원조를 청하였다. 5월에 부하 박노천(朴魯天)・이기학(李基學) 등으로 하여금 태황제의 복위・외교권 회수・통감부 철거 등의 30개조에 달하는 한국민의 기본요구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국내외의 외교적・정치적 의병운동 선전뿐 아니라, 경기도를 돌면서 의병전쟁을 전개하여 많은 왜적을 무찔렀다. 이때 그는 말하기를 "나는 내가 하는 일이 꼭 이루어 진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차마 왜적과 함께 살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하였다. 즉 의병전쟁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예감하면서 목숨을 던져 항쟁을 계속한 것이다. 군사를 이끌고 연천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이완용(李完用)이 사람을 보내어 외부대신(外部大臣)을 주겠다고 유인하였다.

 

휘하의 군사들이 심부름 온 사람을 죽이려 하였으나, 그는 "보낸 사람이 죽일 사람이지, 온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느냐"하며 되돌려 보냈다. 그 이튿날 밤 헌병 40명에 의해 포위당하여 끝내 체포되니 1908년 5월 천둥치고 비가 크게 내리는 날이었다. 얼마후 서대문 감옥에 이송되었는데 일본인 명석소장(明石少將)이 의 경력・이력 그리고 충군애국(忠君愛國)과 동양평화에 대한 탁월한 경륜, 한학과 역학에 대한 깊은 조예 등을 알고 모든 백성들의 사표라 해서 마음 속으로 공경하고 복종했다. 이때 명석(明石)과의 문답 중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오. 실상은 속으로 한국을 멸할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들이 앉아서 볼 수가 없어서 적은 힘으로나마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그의 의병을 일으킨 뜻은 단순한 화이관(華夷觀)에서가 아닌 것임은 이로써 명백해졌다고 하겠다.

 

명석이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날로 커져 그의 생명을 구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9월 27일 교수대에 올라 51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총대장 가 순국한 후에도 이곳 의병들은 더욱 고무되어 게릴라 항전을 보다 강력히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허위의 생애

경상북도 선산의 대지주인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면서 전국에서 이에 반발하는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허위도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에 분개해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독립운동에 나섰으며[1] 경상도에서 이기찬, 이은찬등과함께두차례의병을일으켰다.

 

대한제국 고종은 그를 등용하여 성균관 등에 기용했는데, 1904년에는 사법 기관인 평리원의 재판장 서리가 되었다. 이해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 사건이 일어나자 이상천, 박규병 등과 함께 격문을 살포하면서 저항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어 또다시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허위는 이번에는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전국에 흩어진 의병부대들이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 진공을 노렸을 때 이인영을총대장을삼아출범한의병연합군 13도 창의군에서 진동창의대장을 맡았다. 허위의 부대는 서울 근교까지 진군하였지만 패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인환, 권준 등과 연합하여 계속해서 유격전을 벌이면서 계속 저항했고, 거듭되는 여러 회유책에도 굽히지 않았다. 이강년, 유인석, 박정빈등과함께결사항전을주창한강경파로활동하며한일강제병합을추진중이던일본을끈질기게괴롭혔다. 결국 1908년 양평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일제 강점기 동안 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가두고 사형시킨 서대문형무소, 당시 경성감옥의 제1호 사형수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허위의 가족과 후손

허위는 4형제 중 막내였는데, 그의 맏형은 항쟁에 군자금을 댔고 셋째형 허겸은 의병 투쟁을 함께 했다. 일제의 국권 침탈 음모를 내다보고 격렬히 저항한 허위의 집안은 그의 죽음 이후 더이상 선산에서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견디다 못한 허겸이 허위의 4남 2녀를 동반하여 1912년 서간도로 망명했고, 사촌들도 이어 그의 뒤를 따랐다. 결국 허위의 조카인 허형식을비롯해많은후손들이독립운동에나섰는데, 이로 인해 자손들이 해외에 뿔뿔이 흩어졌고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독립 운동가의 자손들이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문제가 제기될 때 허위의 후손들 예가 종종 인용된다.

 

구미오페라단 소개

 

◦ 2000년 창단후 창작 오페라 박정희(새마을과 눈물많은 초인), 메밀 꽃 필 무렵,

호국오페라 왕산허위등 100여회 오페라 및 음악회 개최

◦ 경상북도 전문예술단체 6호지정

◦ 경상북도형 예비사회적기업지정

◦ 경상북도 문화예술 집중지원단체 지정

◦ 구미시문화예술회관 상주단체

◦ 제2회 대한민국 오페라대상 수상(창작부문 금상)

◦ 2011 재2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발 초청공연 (서울예술의전당/7.21~24)

 

오페라 왕산공연연혁

 

◦ 2010.11.5.오후3시,7시30분(2회) 구미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 2011.9.8오후3시,7시30분(2회) 대구오페라하우스

◦ 2011.10.21 오후3시,7시30분(2회) 경상북도학생문화회관(포항)

◦ 2014.11.20.오후7시(1회) 구미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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