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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경북/작가 초대석] 안동사람 김석현

[사건명] 농민운동 탄압분쇄 상주농민 규탄대회

 

[사건일시] 86.8.12~14

 

[사건배경] 80년대 들어 학생운동은 노동자, 농민운동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민주화운동의 역량을 확대하고 연대의 폭을 넓히려는 입장을 굳건히 세워 나갔다. 농촌활동은  그러한 학생운동의 방침을 구체화 한 활동의 일환으로 채택되었다. 경북에서도 경북지역의 거의 모든 대학들과 서울지역의 대학에서 농촌활동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정부당국과 문교부에서는 장관까지 나서서 학생운동의 농촌지원활동의 목적을 왜곡하고 사상적의도로 몰아갔으며, 마침내는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방송과 신문에서는 농활에 대한 특집이 자주 보도되었고, 지역 단위에서는 행정조직과 학교와 교육청, 농협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농활을 거부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전국각지의 농촌으로 자발적으로 진출하였고, 농민운동 역량이 있는 지역에서는 적극적으로 농활을 유치하였고, 일손이 부족한 마을에서는 다급한 나머지 정부의 갖은 악선전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학생들의 농활을 받아들였다 농활에 참여한 학생들의 자세도 해를 거듭할수록 성숙해 갔다. 초기에는 정치선전에 치중하는 미숙함과 조급함을 드러내기도 하였으나, 곧바로 부족한 농촌인력을 지원하려는 본래의 활동으로 돌아갔다. 무엇보다도 성실한 자세로 일함으로써 농민들의 불안을 해소시켰고, 농민들은 그러한 학생들의 활동에 감동하였고, 학생들 또한 농촌의 어려운 실정을 힘겨운 노동을 통화여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농활이 끝 날 즈음에는 학생과 농민들이 일체감을 느낄 정도로 친숙한 관계로 발전되어 갔다. 농활 마지막 과정에서 마을 잔치와 문화 행사가 열릴 즈음에는 농민과 학생사이의 어색함과 불신감은 이미 눈 녹듯이 사라지고 학생들의 정치선전마저 받아들이는 단계로 발전되어 갔으며 마을에서는 오히려 학생들에게 겨울이나 내년에 꼭 방문해달라고 요청할 정도 농민-학생과의 관계가 눈에 뜨이게 개선되었다. 상주 농민들의 투쟁은 대학생 농촌활동에 대한 무리한 왜곡 선전과 농민운동을 탄압하려는 당국의 무리한 시도가 빚어낸 사건의 대표적 사례이다.

 

[사건 전개과정] 1985년 8월 이후 당시 상주군 와서면 봉강2리의 오정면, 오덕훈, 오정섭, 이철 등 농민들이 경북 기독교 농민회와 연계하여 농민교육을 받고 농민회 창립을 목표로 86년 들어 적십자 회비 강제징수 반대, 시청료 납부 거부, 규산질 비료 강제 판매 반대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실시된 꽃길 조성 강제부역 반대 등 다양한 합법활동을 전개하였다.

 

86년 7월경 대구의 계명대 학생 40여 명이 봉강리로 들어와 농촌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학생들도 처음 하는 농활이었고 농민회로서도 처음 받는 농활이었다. 당시 문교부장관이 대학생들의 농활을 불법으로 규정한 탓으로 농활에 대한 탄압과 감시가 매우 심했다. 그러던 중 봉강 초등학교 교장이 애향단 간부들을 불러 놓고 대학생들이 마련한 프로그램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고, 대학생들의 무슨 말을 하든지 듣고 와서 학교에 이르라고 지시하는 상식이하의 비교육적인 처사가 발생하게 되었다. 농민회에서 파악해 보니 사실이었다. 농민회에서는 '000 교장 망언 규탄 대책위원회' 명의로 교육장, 경찰서장, 군수 앞으로 부고를 전하는 노란 봉투에 넣어 질의서를 발송하였다. 화가 난 관계 당국에서는 벼르고 벼르던 끝에 농활이 끝난 며칠 후에 글씨의 당사자로 오정섭 회원을 지목하고 무고죄로 구속하였다. 농민회로써는 처음 당하는 구속 사태를 당한데다 오정섭 회원의 모친이 이 일로 충격을 받아 앓아 눕는 바람에 적당한 선에서 타협점을 찾기로 하고 경찰들과 협상하였다. 처음에는 반성문을 쓰면 풀어 준다고 해서 농민회에서는 대폭 양보하여 오정섭 회원의 반성문을 제출하였으나 경찰은 약속을 어기고 앞으로 농민운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하고 나왔다. 또한 당시 민정당 동책을 통하여  " 오정면, 오덕훈 등 핵심 활동가들이 당시 민정당 국회의원(김상구)에게 와서 사과하고 농민회를 안 하겠다고 약속하면 바로 오정섭 회원을 석방하겠다"는 회유도 전달되었다. 명백한 농민운동 탄압에다 농민운동의 싹을 철저하게 자르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굴욕적인 요구였다. 농민회에서는 농민화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단호한 투쟁을 결의하고 경북각지에 산재해 있는 모든 회원들에게 연락을 취하고(모두 30명 수준) 계명대학교, 전국본부, 가농 대구연합회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대회 당일(1986.8.12)에 기독교 농민회 중앙위원회 관계로 지원이 불가능 한 상황이었다. 대회 당일 이른 아침에 왕산 꼭대기에서 플래카드를 제작하고 급한 대로 대회준비물을 준비하여 전날 김영필 주임신부에게 허락을 받아 놓은 1차 모임 장소인 상주서문동 성당 뒷 뜰로 회원들이 집결토록 하였다. 상주와 경북각지의 회원 10여 명, 충북 영동의 박장균 등 3명, 선산의 가톨릭 농민회원 마경열등 3명, 계명대학생 10여 명 등 모두 30명에 못 미치는 인원이었다.

 

1986.8.12 한낮(12시경) 뙤약볕 속에 농민가를 부르며 거리로 나섰다."농민운동 탄압하는 군사독재 타도하자"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행렬 뒤로는 죽창과 자갈을 실은 경운기가 뒤를 따랐다. 상주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가행진을 하면서 동상 로터리에 이르렀을 즈음에 경찰들이 합동으로 1년에 한 번하는 시위 진압훈련을 하는 날이어서, 점심을 먹고 오침을 하던 중에 비상이 걸려 출동한 것이었다. 농민들은 곧바로 죽창으로 무장하고 대오를 정비하면서 경찰을 향해 단호한 투쟁의지로 대응하였다. 농민운동 탄압을 분쇄하기 위하여 지도부의 구속을 각오하고 분연히 일어선 비장한 투쟁이었다. 경찰의 응전은 의외로 허술하고 오히려 소수의 농민들에게 밀리기 시작하였다. 실전 시위 진압을 해 본 경험이 없던 경찰은 별다른 장구를 갖추지 않고 작업모에 경찰봉만 차고 나왔으니, 죽창을 당해 내지 못하고 몇 차례나 뒤로 밀렸고 농민들은 정신없이 밀어붙였다. 그러던 중에 최루탄이 터졌다. 뒤늦게 창고에서 가져와 던졌는데, 한참 후퇴하다가 뒤를 돌아보니 경찰이 오히려 도망가고 있었다. 엉겁결에 방독면도 쓰지 않고 사과탄을 까서 던졌는데, 바람이 경찰 쪽으로 불어 경찰이 오히려 피해를 보게 된 것이다. 농민들은 대오를 정비하여, 죽창을 길바닥에 내려치며 박자를 맞춰 노래를 부르며 로터리를 한 바퀴 돌아 서문동 성당으로 유유히 철수하였다. 한 명의 연행자도 없었으나 의성에서 온 김정욱 회원이 경찰과의 싸움 과정에 다리를 접질러 발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다. 농민들이 집회를 마치고 성당으로 피신하자, 성당에서는 임시 사목회의를 열어 농민들을 '긴급 피난자'로 규명하고 참으로 따뜻한 배려를 해 주었다. 신자들이 나와서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의성의 유강하 신부까지 와서 경찰과 접촉하며 농민들을 격려하였다. 구속을 각오하고 농민운동탄압에 정면으로 저항하겠다는 마음하나로 무모한 투쟁을 벌인 농민들에게는 참으로 따뜻한 배려였다. 그날 중앙위원회를 개최하던 기독교 농민회 전국본부에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투쟁소식을 전달받고 회의를 중단하고 모두 농성장소인 상주 서문동 성당으로 관광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경찰은 도경의 병력을 지원 받아 성당을 물 샐 틈이 없을 정도로 포위했으나 결국 8.14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달 하고 병력을 철수하였다. 구속되었던 오정섭 회원은 1심에서 징역형에 집행유예를 선고 받았으나 항소하여 결국 무죄를 선고 받았다. 농민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무리한 구속이었음이 입증된 것이다.

 

[사건 내용] 상주군 와서면 봉강2리 농민들은 오정면, 오덕훈, 오정섭 등 농민들이 농촌의 구조적 문제점을 농민의 삶속에서 체득하고 스스로 농민운동에 참여한 경우이다. 농민들은 농민교육과 전국 각지에서 투쟁하고 있는 농민운동의 경험을 전달 받으면서 마을 단위 활동으로부터 조직의 역량을 키워 나갔다. 이러한 봉강리 농민들의 활동은 인근 지역의 농민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고, 당국은 농민들의 역량강화를 주시하게 되었다. 결국 86년 들어 계명대학교 학생들의 농촌활동이 유치되자 관계당국은 아연 긴장하게 되었다. 결국 초등학교 교장이 어린 학생들에게 고자질을 강요하는 비교육적인 처사까지 자행하게 되자 농민들은 질의서 로 대응한것이다. 농민들의 합리적인 질의서에 대해 경찰과 검찰은 무고죄라는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씌운 것이다. 열성적인 활동가의 구속으로 농민운동의 기세를 초기부터 제압하겠다는 경찰의 의도는 오히려 농민들의 결연한 투쟁을 부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농민들은 지도부의 구속을 각오하고 투쟁을 준비하였으며, 30명 미만의 적은 인원과 최악의 조건아래 투쟁에 임하였으나 끝내 기적적인 승리를 쟁취하였다. 핵심활동가 오덕훈의 구류처분(15일, 10일 만에 석방), 오정섭의 무고죄 구속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투쟁으로 자신의 조직을 지켜 낸 것이다... 경찰과 관계당국의 무리한 농민운동 탄압은 결국 좌절 되었으며, 투쟁과정에서 1명의 중상자 (의성 김정욱)가 발생하였으나 경찰과 공권력의 권위는 지역사회에서 급격하게 추락하는 결과를 자초하였다.

 

[관계 인물]오정섭, 오덕훈, 오정면, 김종길, 최진국, 박정서, 권찬동, 정택동, 김석현, 김종일, 김정욱, 박완서, 박장균, 권대성, 김의수, 마경열, 윤상구 등

 

[관계 단체] 상주군 농민회 준비모임, 경북 기독교 농민회, 가톨릭 농민회 대구연합회, 전국 기독교농민회 총연합회, 상주시 서문동 성당 사목위원회

 

[관계 자료] 1.「농촌과 목회」, 2004년 봄호 126 - 137p.

2. 같은책, 2002년 가을호 165 - 166p

3. 같은책, 2002년 겨울호 150p

4.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합회, 1992.11.10, 「한국기독교농민회 10년사」, 100~102p(대구 경북-농민027)

 

[관련 사건] 농민회원 오정섭의 무고죄 구속사건.

 

* 위내용은 2007년 6월 13일. 사) 대구경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가 발행한 '지역민주화운동사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 최종보고서-대구.경북지역' 273쪽부터 게재되어 있다. 특별히 위 내용을 인용하게 됨이 기자가 전하려는 의도와는 개연성이 없으며 위 내용에 등장하는 김석현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동의하에 인용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하지만 위 내용에  실명이 거론됨이 불편, 부당하다며 수정이나 보완을 요청해 오신다면 언제던지 존중해 드리겠음을 밝힌다.

 

 

 

 

2014년 7월 18일(금)

 

드디어 비가 온다.

 

드디어?

 

안동호, 임하호 저수율이 각각26.8%, 28% 정도이니 그동안 가뭄도, 한낮의 땡볕 더위도 어느정도 였는지 가늠케 한다.

 

그러던 터에 비가 오니 '드디어 오는구나!'  했는데 금새 또 그친다.

 

논바닥이 갈라지고, 저수지 바닥이 드러나고 걱정들이 많은데 다른곳은 장마로 물난리를 겪고 있단다.

 

그로인해 안동사람들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언제부터 였는지 알 수 없으나 안동은 늘 그렇게 태풍도, 장마도 비켜가는 안동사람들 만이 하는 말로 '축복받은 땅' 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안동을 지키겠다며 애쓴 사람들이 어디 한두분이었나!

 

그런데 뜬금없이 김석현 이라니!

 

그러실 테지만

 

그냥 김석현이 1984년도 발표한 시(詩)한편 소개하려 하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 졌다.

 

1984년 실천문학사가 펴낸 '14인신인작품집 - 시여무기여' 1권에 수록된 7편의 김석현 시 가운데 '가정방문'을 소개하려 한다.

 

 

 

가정방문

 

가슴이 이토록 미칠 것같이 두근거리나

우리아빠 엄마는 저기 보리밭에

김매고 있는데

땡볕에 물 한모금 날라줄 사람 없어

참아가며 일하는데

아빠는 선생님 눈총 받으면 안 된다며

주머니 탈탈 털어 수업료 주시고

즐겨 피우시던 담배도 안 피우시며

파릇한 싹들을 보사피는데

핏기 없이 뽀얀 선생님이

우리집 쪽으로 오시는데

검게 그을린 얼굴이 자랑스러운데

별일이다, 참 별일이다,

가슴이 이토록 미칠 것같이 두근거리나.

 

이 시는 특별히 '교육시선집'에서도 소개됐다.

 

경북영양에서 태어나 안동 일직으로 와 자라면서 누구보다 가족, 이웃, 사회 등 그런 관계를 소중하게 여겼을 그 이기에 가정방문으로 김석현의 정체가 탄로 나는걸 두려워 하지도 않을것 같은데 '오히려 선생님께서 불편해 하셨을것 같다' 뭐 이런 이야기인가?

 

'핏기 없이 뽀얀 선생님!'

 

분명 선생님이 아닌 그것일 텐데, 그것이 뭘까?

 

1984년이면 김석현의 나이 군에 갔다 온 25~6살 쯤.

 

그러니까 이시의 구상은 84년이지 그이전 학창시절은 아니지 않은가.

 

마치 '내가 뭐 어때서요!"라며 당당하게 맞서는 듯 하다.

 

선생님이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인가!

 

우릴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인가!

 

내가 아는 김석현은 늘 그런 모습이었다.

 

노동운동을 했었고, 정치를 했었고, 그 다음엔 문화를 가꾸겠다며 뛰어 다니던 그 모습에서 김석현이 뭘 지켜내려 했는지 금방 알 수 있는데.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나!

 

 

 

 

동문로타리 두잔집에서 들깨에 왕소금이 섞인 기본 안주로 막걸리를 마시려던 김석현에게 4000원 하는 계란말이 안주를 시키겠다고 하니 뭘 그러냐며 고개를 젖는다 . 그러면서 얼마전 하던 일 그만뒀다며 백수라고 하는 걸 보면 기어코 시킨 내가 더 미련하게 됐다.

 

두잔집을 나오면서 '김석현이 이빨빠진 호랑이!'란다.

 

'56년생이면 정치인 누구도, 방송인 누구도 또래지 않나?' 라며 "다시 시작하지 뭐"라고 했더니 늙었단다. 허허...

 

 

그날밤 용상동으로 향하는 11번 시내버스 막차에 몸을 싣던 그를 지켜 보며 '다음 승차시 충전이 필요 합니다'라는 안내 소리가 들릴 것 같아 괜히 내가슴이 두근 거렸다. 한참동안 그렇게 나혼자 어둠속에 버려져 있었다.

 

우리 모두가 막차라고 하겠지만 누구는 그쪽 방향으로 처음 가는 길일수도 있지 않을까?

 

재충전해서 자신있게 함께 타 보는게 어떨지!

 

* 김석현

 시인

 대한장기협회 안동시지부 사무국장

 아내와 '꽃과 나무' 꽃집 운영

 

                                 NEWS경북' 자랑스런 경북인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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