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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경북=창간1주년 특집] 40년 재봉 일 ... 안동시 구시장내 '모이세' 옷수선가게 권성복씨 이야기 (주님은 나의 목자)

 

 

40년 재봉일 ... 안동시 구시장내 ‘모이세’ 옷수선가게 권성복씨 이야기 (주님은 나의 목자)

 

 

 

 

 

 

 

“매년 5월이 되면 보고 싶은 얼굴이 있어요.

아버지, 엄마 ,,, 그리고 누나!“

 

“안동서부초등학교에 다니던 2학년 말인가 집을 뛰쳐나왔어요.”

 

안동시 구시장내 ‘모이세’라는 옷 수선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권성복씨(55세)와 마주 하면서 처음 꺼낸 말인데 한참 동안 말문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가 군인이셔서 근무지에 따라 우리도 이사를 해야 했어요. 월남전에 파병되었던 아버지가 복무기간도 다 채우지 못하고 집으로 온 건 우리식구의 막내가 된 4째를 출산하자 말자 집을 나간 어머니 때문에 우리를 돌 볼 사람이 없어서였고요.”

 

우릴 돌보시던 할머니까지 몸이 아프셔서 아버지께서 조기 제대를 한 것이다.

 

그로인해 아버지는 늘 술로 하루를 이으셨고 우리들은 자상했고 행복하기만 했던 어린 날의 아버지를 떠올려 보는 일로 하루하루를 견디게 되었다.

 

언제쯤이면 끝이 날까 간절히 바랐지만 그럴수록 아버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폭행을 일삼았고 우리들은 밥 한 끼 못 먹는 버려진 아이들로 변하고 있었다.

 

“서울 태능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 고향이 안동이어서 안동에서 살게 되었지만. 군인이어서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살았어요. 조기 제대 후 제 나이 8살 무렵 아버지는 새엄마를 만났고 군 생활로 모은 돈은 삼촌의 사업제안으로 몽땅 날려 버린 상태여서 어렵기도 했지만, 그런 이유로 아버지의 주벽이 매일 이어져 견디기 힘들었지요. 그런 일들로 아버지가 무섭고 겁이나 집 근처 다리 밑으로 숨기도하고 그곳에서 밤을 꼬박세우기도 했었어요. 결국 집에서 도망쳐 나올 때 아마 누나도 같이 나온 것 같아요. 지금까지 소식을 모르죠. 5월이 되면 나도 어엿한 가정을 꾸렸는데 다들 보고 싶고 그립죠. 특히 누나도 ...”

 

무작정 집을 나와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 전에 살았던 양평엘 갔지만 반겨주는 이 아무도 없고 해서 곧장 다시 안동 집에 왔는데 책가방과 책을 불살라 버렸다고 해 어린마음에 큰 상처를 받고 정말 가출을 결심했던 권성복씨.

 

성복씨는 10살 때부터 그런 이유로 고아 아닌 고아가 되었다.

 

집을 나와 무작정 서울로 갔는데 며칠 동안의 고생으로 거지꼴이던 성복씨를 경찰이 발견 고아원엘 데려다 놓았다.

하지만 똑같은 배고픔에 연일 폭행까지 이어져 3개월 정도 있다가 도망쳐 나온다.

 

서울역에서 인신매매를 당해 죽어라 고생만하다 2달 만에 탈출, 대구로 가(칠성시장 근처) 구두닦이 등으로 연명했으며 배고픔으로 또 도망을 해 전라도 이리, 하동 구례 곡성으로 전전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농사일을 시켰고 견디기 힘든 고단함과 외로움에 힘들어 14살 쯤 충북청원 옥산으로 도망갔지만 시골이라서 어쩔 수 없이 배고픔에 농사일을 하는 머슴살이를 하게 된다.

 

“그때 기억하기로 7월 칠석날 독사에게 물려 소달구지를 타고 가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살아나기도 했다”며 그날의 상처를 보여 준다.

 

그렇게 농사일을 하던 중 15살 때 쯤 인가 주인에게 안동엘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꼭 다시 오면 월급으로 쌀 2가마니를 주겠다는 등 제 할 일 묵묵히 해치우는 성복씨를 집주인은 아쉬워하는 눈치였다고 했다.

 

다녀 오겠다는 그것은 변명이었고 성복씨는 늘 비상구를 찾고 있었다.

 

안정된 직장이나 돈을 많이 주는 곳이 아니라 정말 사람의 정을 찾아 다녔다고 말했다.

 

안동에 도착해 전에 살던 집을 찾아 갔으나 이사를 해 물어물어 집을 찾게 되었으며 며칠 머무르게 되는데 어느 날, 새어머니가 양복 일을 배워보라며, 가정형편이 어렵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그때가 1975년쯤 이었다.

월급도 있고 우선 밥 해결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야지”

어쩔 수 없어 그렇게 하겠다고 했던 일인데 며칠을 다녔을까 도시로 가면 돈도 더 많이 받고 기술도 빨리 배운다며 알고 지내던 사람이 권유를 해 대구를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바지 만드는 기술을 배우게 된다.

 

그러던 중 또다시, 이곳보다 대우가 좋다는 소개로 부산에 있는 양복점을 찾아 갔지만 양복일이 아닌 세탁일을 하게 된다.

 

떠돌이 생활에서 목표나 각오를 세웠을 만도 한데 몸에 배어서 인지 기술은커녕 끼니도 해결이 안되는 세탁소일에 질려 하루하루가 고단하기만 했다.

 

80년초, 잠시 다녀올까 해서 안동엘 왔다가 우연히 안동동부동성당엘 가게 되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발걸음이 성복씨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고 했다.

 

성당엘 가고 오는 그런 생활이 너무도 좋았고 그곳에서 듣게 되는 말들과 사람들의 모습에서 고마움을 느껴 정말 행복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작정 놀고먹을 수 없어 82년쯤 다시 부산으로 갔는데 며칠 동안 다녀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던 성복씨.

 

먹고 사는 문제가 막막해 노숙을 일삼았고 우연히 고기잡이배를 탔지만 배 멀미로 고생, 결국 빈털터리가 되어 거지로 전전했으며 유일한 벗은 어디선가 라디오에서 들려주던 노래에 위안을 삼는 일로 가까스로 생명줄까지 이을 수 있었다고 했다.

 

"절망’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뒤에 소개 하겠지만 ‘고아’라는 노래가 하루는 죽음으로 때로는 새로운 희망으로 자신을 저울질 하고 있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면 차라리 편안해졌다고 했다.

 

그때 부산 용두산공원 주변에 손금 봐주는 점쟁이들이 왜 그렇게 많던지 어느 날 손금을 봤더니 ‘나중에 부자된다’는 말을 들었고 '나에게도 나중이 있구나'라며 혼자 웃기도 했단다.

 

 

 

 

나는 누구인가!

 

한 3년 그러다 85년 안동에 다시 오게 된 성복씨.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것도 아주 우연히.

친구도, 그렇다고 누가 소개를 해 준 것도 아닌데 어느 날 지금의 아내 심**씨가 눈에 들어 왔다고 했다.

 

운명인지 하늘이 내려 준 복인지 만나고 하던 얼마 뒤 곧장 동거하게 되었으며 지금의 큰아들을 얻었다. (86년 큰아들 권**(현 30세), 현 안동 **학교 축구코치, 88년 둘째 딸 권**, 현 안동 **어린이집 교사)

 

하지만 말이 결혼생활이지 정말 어려웠으며, 아내에게 있어 신혼이라는 말도, 꿈도 못 꾸었던 끔찍한 일들의 연속 이었다.

 

양복점 직공으로 일을 해 버는 돈으로 겨우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팔이 아프다고 하던 새어머니를 치료하러 병원엘 갔는데 주사 탓인지 혈압으로 쓰러져 그로부터 3년여 병수발을 했지만 그만 세상을 뜨고 만다.

 

그런 이유로 아버지로 부터 ‘이 모든 게 너 때문’이라며 자신은 물론 아내도 걸핏하면 얻어맞고 괴롭힘을 당해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어린 두 남매를 데리고 89년 분가를 하게 되었고 월세를 전전하게 된다.

 

90년에 와서 다니던 양복점(라사)에서 가불을 해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부조금도 아버지가 다 없애 결국 빚만 지게 되었다.

 

그 다음해 인 91년, 처가의 도움을 얻어 드디어 세탁소를 창업하게 되지만 안동에 신시가지가 생겨나 동네가 텅 빌 정도로 사람들이 떠나 가 세탁소 수입마져 줄게 돼 세탁소를 접고 포장마차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 일도 새벽 4시까지 취객들을 상대하는 일로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청송에 있는 세탁소에 월급을 받으며 주말에 안동에 오는 두 집 살림을 하게 된다.

 

그런 일을 겪을 때면 가정을 지켜야지 하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우리를 찾아왔다.

 

알고 보니 경남 밀양이 고향인 엄마는 그 길로 고향 근처로 가 4째와 함께 살다 결국 4째를 버리고 영양 입암 어느 암자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 4째가 우릴 찾아 온 것이다.

 

이모로부터 안동에 형제가 있다고 전해 듣고 물어물어 찾아 왔다고 했다.

 

28년 만에 그런 극적인 재회를 하게 되었는데

 

그런 얼마 후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4째가 자살을 했다는 연락을 받아 갔는데 뜻밖에도 그 자리에서 친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친엄마가!

 

가끔씩 꿈속에서라도 보고 싶었던 엄마였었는데, 바로 내앞에 지금있는데, 기쁨의 눈물 보다 원망과 분노가 치밀었으며 결국 아무말도 못 나눴다고  했다.

 

화해도 하지 못한 채 형의 시신을 수습하고 돌아 왔는데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한 스님으로 부터  그런 엄마의 죽음을 전해 듣는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두려움 속에서도 곧장 '엄마, 우리 엄마'를 부르며 병원으로 달려갔던 성복씨.

 

어린 성복이가 아니라 엄마를 위해 뭐라도 할 수 있는 어른이 된 성복씨가 이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자책감에 괴로워 벌벌떨며 병원을 찾았다.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안동 **병원에서 주검으로 마주한 아들의 심정은 슬프고 안타깝기만 했을 터인데, 형에게 연락을 하니 ‘우리엄마가 아니다!‘ 라며 냉정하게 대하는 모습에서 불현듯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갖었다고 했다.

 

나를 그렇게 못살게 굴었던 어렸던 날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이제와 그 큰 짐을 자신만 떠맡게 된 현실에서 도대체 그들은 누구이며, 무엇인가가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이상한 의문에 혼이 나간듯한 시간을 견디었다.

 

분하기도 하고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혼자서 상복을 입고 장례를 치르고 화장을 해 유골을 영양에 가서 뿌렸다고 했다.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살았다. 용케도 견디었다며 잠시 고개를 떨군다.

 

두손을 모은 채.

 

한 2년 흘렀을까. 94년쯤 안동에 있는 메이커 기성복 옷가게 사장님의 권유로 옷가게에 취업해 안동에 정착해 일해 오던 중, 오트바이 사고로 발을 다쳐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 계기가 되었고, IMF로 경영이 어려워 진 옷가게 주인의 눈치로 그만두게 되어 일자리를 찾아 구미로 가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안동엘 다시 왔으며 구시장에 겨우 자리를 얻어 과일장사를 하던 중, 근처 옷가게 사장님의 권유로 99년, 옷수선 가게를 하게 된다.

 

최초의 자신의 가게를 만들게 된 것이다.

 

순탄치만은 않았다.

될 만하면 자리를 비우라, 건물을 다시 짓는다는 등 이유로 쫒겨 나기를 여러 번.

 

단골이 불어나는가 하다보면 옮겨야 하고 또다시 시작해야 하는 악순환을 겪었다.

 

심지어 무허가라며 누군가 고발을 해 벌금도 물었다.

 

어떻게 살아 왔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나한테 계속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고민할 새도 없이 하루하루를 견디었다.

 

건물과 건물사이 좁은 공터에서 어린 아이들을 키웠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곳에서도 아이들 스스로 아무런 탈 없이 건강하게 잘 자라 준 것이다.

 

분명한 것은 아내의 큰 사랑으로 우리들 가정이 지켜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지금인데 아버지를, 어머니를 원망하고...

그런 것 없다.

무한한 축복 속에 살고 있는데, 마음 비우고 다 고마운 일들로 기억하며 항상 기도로 잘 되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누나가 보고 싶다."

 

혹시나 해서 술집으로, 여러 곳을 찾아 다녔다.

 

그런 나의 모습을 지켜보는 이, 애달파하는 이

바로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힘들고 외롭고 고달플 때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불러주던 이,

언제나 제자신 이었어요“

 

본인의 출생에 관한 것도 가족의 의미도 전혀 몰랐던 어린 날에 오로지 매를 피하고 굶주림에서 벋어나려 도망쳐 다녔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라는 이름으로 똑 같은, 아버지와 자녀 그리고, 가족이라는 모습으로 만들어진 이 현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축복이라고 했다.

 

도망을 친 것이지, 뭔가 꼭 희망을 이루려 했던 것도 아니라고 했다.

 

한마디로 얘기하라며 ‘그런 어려움이 있었기에 더 열심히 살아 온 것 아니냐?“고 묻자

그때마다 자신이 결정한 것이라고 하기보다 그런 소리가 저절로 들렸다고 했다.

 

지금까지의 일과, 결혼에 이르는 사랑과, 또다른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만든 자신의 세계를 자신이 애써 만들었다고 말하기보다, 무엇엔가 이끌려 부모님 세상과는 다른 자신의 세상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는 일념으로 살다보니 어느 날 이런 모습이 주변에 있더라고 말했다.

 

늘 그것에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향이 좋아?“

 

내가 힘들어 눕던 곳이 방이요 집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럴 때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가 큰 위안을 줬다.

 

양복점 일이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듣게 되는 즐거움도 있었다.

 

그런 시절에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모으고, 들으며 위안을 삼았었다.

 

79년도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김상진의 ‘고향이 좋아’라는 노래가 들려 올 때면 기분이 좀 그랬다고 웃는다.

 

자신에게 있어 고향은 늘 고통과 잊고 싶은 곳이었다고 말해 준다.

‘아~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정작 성복씨는 안동이라는 아버지의 고향에 와서 살고 있다.

 

80년 들어서면서 테이프에서 레코드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때 우연히 전축으로 외국 팝송을 접하게 되었는데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

 

그때부터 한 장, 두 장 모았던 것이 지금은 3,000여 장 쯤 된다.

 

흔히 요즈음 하는 말로 ‘귀한 레코드도있겠지요’라고 물었는데 전부 귀한 레코드라고 답한다.

 

한때 형편이 어렵던 나에게 생활신문사에 다니던 후배가 그곳에 팔겠다는 광고를 올려 주면 자기 실적도 올라간다는 말에 광고를 냈더니 사러 온 분이 한 장씩 꺼내 보면서 자신이 필요한 것만 사려해 취소했다고 말했다.

 

그런 이유 중 첫번째가 김정호 레코드만 골라 사겠다고 해서 화가 북받쳤다고 했다.

 

김정호 레코드는 레코드가 아니라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였는데 김정호를 버리며, 빼앗기는구나 하는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윤수일과 솜사탕(1집) 꿈이었나봐, 현철과벌떼들의 다함께 춤을춰요(원곡은 I Was Made For Dancing - Leif Garrett), 서기1992년의 폭우, 보니엠, 굼베이댄스밴드, 영화음악 나자리노 등등

 

그중 꼭 한곡만이라고 묻자 ‘모나코 원판’, 루이암스트롱의 ‘섬머타임’ 이라며 요즘도 즐겨 듣는다고 했다.

 

‘마나코’라고 시작되는 이 노래는 처음부터 끝까지 쏟아지는 그 음량으로 인해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매번 들을 때 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본 기자가 예전에 DJ시절 느꼈던 감동을 똑같이 말하고 있어 많이 신기했음...)

 

그런 그가 불쑥 ‘고아’라는 노래도 있었다며 그 노래는 차마 말하지 않으려 했다더니 갑자기 노래를 부른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이 노래를 부르며 굶주림을 견디었다, 원망을 삼켰다고 했다.

 

날때부터 고아는 아니었다내 죄아닌 내 죄에 얽매여들풀처럼 살아온 이 한 목숨가시밭길 헤치며 살았다*상처뿐인 내 청춘 피 눈물 장마아 누구의 잘못인가요누구의 잘못입니까(아 누구의 잘못인가요누구의 잘못입니까)2.배고플때 주먹을 깨물었고서러울땐 눈물을 삼켰다의리로서 맺어진 이 한 목숨목숨까지 바치며 살았다 <구전가요 고아, 유승혁 노래>

 

 

 

 

 

 

 

 

 

“주님은 나의 목자!”

 

98년 3월 새어머니가 돌아 가셨다.

 

또한 그해 10월 아버지께서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양복일을 해 번 돈은 꼭 모아 나중에 가게를 차릴 때 주겠다”던 어머니셨다.

밥도 해결되고 잠자리도, 기술도 배울 수 있다고 이끄셨던 분이다.

 

내가 벌어 온 돈이 늘 적다며 우리에게 화를 내셨던 아버지도 우리들 곁을 떠나셨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일단은 일과 가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성당엘 가게 되었는데 참 편안 했어요“

80년 부산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중 안동엘 다시와 성당엘 나가게 되었고 그때 ‘모이세’로 세례를 받았으며 지금의 가게 이름도 ‘모이세’로 지은 이유라고 설명했다,

 

우리 식구들 모두가 세례를 받았다.

 

그럴즈음 지역방송국에 계신분이 그런 그간 어려웠던 이야기를 지금도 어려워하고 있는 이웃에게 희망을 전하자고 제의해 자신의 이야기를 라디오생방송에 털어 놓기도 했었으며,

 

또한 특별히 우리들 가족에게 관심과 사랑을 베푸신 김재문 신부님도 알게 돼 지금에 까지 고마운 분들로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늘 용기와 희망을 심어 주신 분이다.

그런 분 들이 어찌 한 둘이겠는가.

 

살면서 나를 이끌어 주셨던 분 들을 생각하면 틀림없는 ‘주님은 나의목자’라며 다짐을 하게 된다.

 

살면서 어떤 노래가 제일 위안이 되었냐고 묻는다면 ‘주님은 나의 목자’라는 찬송가라고 말합니다.

 

장례미사를 도울 때에도 꼭 듣게 되고, 부르게 되는 노래이기도 하기에...

 

그런 이유로 12년째 안동목성동주교좌성당의 성인복사(미사에서 신부님을 돕는 일)단장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꼭 그럴때면 또다른 일이 주어졌지요 ... 늘 감사하고 고맙게 여깁니다”

 

큰형이 있다. 지금은 **조선소에 다니며 자리를 잡았지만 자주 뵙진 못한다.

 

바로 위 누나(권성자, 57세)도 있는데 어렸을 때 헤어진 그 이후 연락이 없다.

 

그런 일들이 “왜 우리가족에게?”라고 간혹 슬픈 기분이 스치긴 해도 그럴 때 마다 “이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고맙지“ ”마음 비우자, 욕심을 버리자”며 오늘 하루 주어진 것만으로도 감사하자며 다짐한다.

 

1999년에 한옥집을 장만했다.

 

가족이 생기고 10년여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 모든 일들이 아내를 만나고부터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져 온 놀라운 일들이라며 겪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인 2011년 안동서부초등학교 32회 동창들이 명예졸업장을 만들어 주었다.

 

큰 은혜와 영광을 얻었다.

특히 제1호 명예졸업장이라는 사실에 동창들이 얼마나 애를 썼을까 짐작이 간다.

 

7년여 기간 동안 고아 아닌 고아 생활을 하며 그때마다 왜 그렇게 도망쳐 나왔는지,

‘그런 길로 가면 안 돼!’ 라며 도망을 다녔는지.

 

그런 궁금증이 풀리는듯 했다.

 

그때 서울에서 막차를 타면 안내양 누나가 종점까지 숨어있던 나를 데려가 밥도 먹여주고 잠도 재워 주었는가 하면 그 다음날 용돈도 준다는 것을 알고 몇 번을 그렇게 이용했음에도 늘 다정한 모습으로 보살펴 주시던 모습들을 되세기며

지금의 현실에서 누구에게 감사해야 할 지 분명하진 않지만 늘 우리 가족들 위로하고 격려해 주신 김재문 신부님 그리고 동창생들과 이웃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12년째 성당에서 성인복사 봉사를 하면서

95년부터 안동경찰서 남부자율방범대에서 봉사했다며 안동경찰서장 표창과, 경북도지사 표창패를 주신 것도 그렇고

2004년부터 안동시 의용소방대원으로,

2005년 장기기증

안동경찰서 중앙치안센터 생활안전협의회사무국장으로,

안동시 서구동주민자치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게 되는

 

그 모든 것에 감사를 전하지 않을 수 없다며 눈물을 닦았다.

 

2015년 5월 뜨겁던 어느 날,

그런 나의 이야기를 여럿에게 전하겠다고 한다.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만 신문에 나는 줄 알았지,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을 주변에 격려와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말에 공감했다.

 

안 되는 일도 또한. 되는 일도 없는 우리들 삶에서 저의 이야기가 조그만 위안이 되었으면 한다는 감회도 전했다.

 

어쩌면 지금도 고아 아닌 고아라는 생각으로, 아니면 현실로 아파하고 최악을 견디시는 많은 분들에게 용기와 격려가 되었으면 한다고 거듭 일러 주었다.

 

 

 

 

   

 

 

 

 

[취재 후기]

 

성복씨의 이야기를 옮겼습니다. 후원이나 도움을 바란다는 취지의 취재가 아닙니다. 성복씨에게 격려를 드려야 겠다는 마음보다 정말 이 시간 최악을 견디시는 분들에게 용기를 전해 드리려 했습니다. 성복씨의 옷수선가게 ‘모이세’에는 오늘도 많은 분들이 흡족한 표정으로 정을 주고, 받으며 다녀 가십니다. 모두가 의미있는 삶을 이어 가고 계십니다. 뉴스경북‘이 그러한 분들을 응원합니다. 감사를 전합니다.

 

* 응원과 격려의 마음을 나누시겠다면 뉴스경북 자유게시판에 올려 두시면 됩니다.  전해 드리겠습니다.

 

 

 

                        뉴스경북' 자랑스런 경북인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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